수학자 / / 2019. 1. 24. 20:13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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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갈릴레오는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은 날에 피사에서 가난한 플로렌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부모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피사 대학으로 보냈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앗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끌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학과 수학에 관한 갈릴레오의 흥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학에서 기하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고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훌륭한 재능을 지닌 과학과 수학분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25세 때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낙하 물체의 공개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얘기에 의하면 학생, 교수,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하나가 다른 것의 열 배 무게인 두 금속 물체를 떨어뜨렸다. 그 두 금속 물체는 실제로 같은 순간에 땅에 떨어졌는데 이 사실은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부정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마침내 그 유명한 식 s=gt²/2 에 따라서 물체의 낙하거리는 낙하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얻어냈다. 그러나 눈으로 확인된 갈릴레오의 실험도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의 믿음을 깨지는 못했다. 대학의 권위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는 갈릴레오의 무엄한 오만에 충격을 받아서 그 곳에서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1591년 교수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그는 파두아(Padua) 대학의 교수로 채용되었는데, 그 곳은 과학적 연구에 보다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여기에서 거의 18년 동안 갈릴레오는 실험과 강의를 계속했고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09년경 정탐 안경의 발명 소식이 갈릴레오에게 전해지자 그는 곧 리퍼쉐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우수한 정탐 안경을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연구를 거듭하여 지난번 것보다 더욱 강력한 네 개의 ('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tele와 '보다'를 뜻하는 skopos로 부터 telescope라 명명된) 망원경을 더 만들었다.

그는 목성의 네 개의 빛나는 위성을 발견하였고, 큰 물체 둘레를 작은 물체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뚜렷하게 확증시켜 주는 관찰을 하였다. 갈릴레오는 또 그의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산, 금성의 위상, 토성의 고리 등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발견은 태양은 완벽하며 지구와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던 많은 성직자의 편협한 반대를 한 번 더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한 성직자는 심지어 갈릴레오를 목성의 네 개의 위성을 망원경 안으로 끌어들인 점을 들어 고소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책을 출간한 다음 해인 1633년에 종교 재판소에 소환되었는데, 거기에서 이 늙고 병든 사람은 고문의 위협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책은 200년 동안이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양심을 위증함으로써 늙은 학자의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무해한 과학적 연구는 계속하도록 허용되었으나 그는 실망하였고 종교 재판소의 감시 아래 실제 죄수인 채로 1642년 1월에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실험과 이론의 조화로서의 과학의 현대정신은 갈릴레오의 은혜를 입은 바 크다. 그는 자유낙하 물체의 역학을 세웠고, 후에 뉴턴이 그의 과학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역학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그는 진공 상태 안에서 투사된 물체의 경로가 쌍곡선 형태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고, 운동량을 포함하는 법칙들을 추측하였다. 그는 최초의 현대식 망원경과 한때 매우 유행했던 부채꼴 모양의 컴퍼스를 발명하였다. 19세기 칸토어(Cantor)의 집합론의 근본적인 관점이며 현대 해석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무한집합들 사이의 상등 개념을 이미 그가 깨닫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갈릴레오의 명제들이 역사적으로 커다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갈릴레오는 그와 동시대인인 유명한 케플러를 질투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케플러가 1619년경 행성 운동의 세 가지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갈릴레오에 의하여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생애 내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따라서 그는 과학자로서 관찰과 추론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견해가 자신이 독실한 신자라고 여기는 교회의 성경에 위배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알고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과학과 성경 사이의 관계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때때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곤경에 처하곤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엽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의 창조론과 조화시키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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