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4. 20:03

아벨(Niels Henrik Abel, 1802-1829)과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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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Niels Henrik Abel, 1802-1829)과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1832)

이 두사람은 동시대인이지만 국적이나 수학적 관심의 관련은 없고 모두 일찍이 천재성을 꽃피우고 나서 미래 수학자들에 영향을 준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요절함으로써 갑자기 애처롭게 사라져간 이유에서 같이 묶었다. 아벨은 26세에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었고, 갈루아는 21세 때 바보스러운 결투에서 죽었는데, 둘 다 생전에 천재성을 똑바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아벨은 1802년 노르웨이의 핀도(Findo)에서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크리스티애니어(Christiania: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옛이름)에 있는 학교에 다닐 때, 일반 5차 방정식의 대수적해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곧 1824년 발표한 유명한 소논문에서 스스로 정정하였다. 이 초기의 논문에서 일반 5차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이것이 봄벨리(Bombelli)로 부터 비에트에 이르는 수학자들을 난처하게 했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다.이 논문의 결과로 아벨은 작은 장학금을 받았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의 여행이 허용되었다. 이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 무한급수의 수렴, 소위 아벨적분, 타원함수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썼다.

아벨은 타원함수에 관한 연구로 야코비(Kacobi)의 자극적이고 친숙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타원함수에 관하여 개척자적인 연구를 해왔던 늙은 르장드르는 아벨의 새로 창간된 (Crelle's Journal로 더 잘 알려짐)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는데, 1권(1826)에는 아벨의 논문이 5편이상 실렸고 2권(1827)에는 이중주기 함수이론을 낳은 아벨의 논문이 실렸다.

해석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아벨의 적분방정식과 아벨함수로 유도되는 대수함수들의 적분의 합에 관한 아벨의 정리와 마주치게 된다. 무한급수에 관한 문제에는 아벨의 수렴 판정법과 멱급수에 관한 아벨의 정리가 있고, 추상 대수학에서 교환법칙이 성립하는 군을 오늘날 아벨군이라 부른다.

아벨은 평생 가난에 시달리고 폐병으로 고생하여 교수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1829년 노르웨이의 프롤랜드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죽은 이틀 후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에 채용한다는 편지가 뒤늦게 배달되었다.

아벨은 생전에 나라로부터 거의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제 그는 조국의 소액 우표에 등장한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특유의 방식으로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아벨의 대한 기념비를 세웠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많은 정리와 이론에 아벨의 이름을 영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에르미트(Hermite)는 아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수학자를 500년 동안 바쁘게 만든 문제들을 남겼다."

아벨은, 그가 그렇게 빨리 그의 학문 분야에 최정상으로 나아가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가의 제자가 아니라 대가를 살펴보는 것이라 답했다.

갈루아(Evariste Galois)는 아벨보다도 더 짧고 더 비극적인 생애를 보냈다. 1811년 파리 근교에서 작은 마을의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그는 15세 때부터 비상한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번이나 에콜 폴리네크니크에 입학하려 했으나, 그의 천재성을 전혀 감지 못한 시험관의 형식적인 요구를 채울 수 없어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또 다른 충격을 받았는데, 성직자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낀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었다. 


참을성 있는 갈루아는 결국 1829년 교사가 될 준비를 하려고 에콜 노르말(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민주주의에 찬동하여 1830년 혁명의 소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수 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석방 직후 21세가 채 안 된 1832년에 애정문제로 인한 권총결투에 유인되어 살해되었다.

갈루아는 당시 수학 교과서를 소설을 읽듯이 쉽게 통달하고, 계속해서 르장드르, 야코비, 아벨의 중요 논문을 읽고 나서 자신의 수학을 만들어 냈다. 17세때 매우 중요한 결과를 얻었으나, 프랑스 과학원에 보낸 두 논문이 보관 잘못으로 분실되어 좌절감만 더해 주었다. 방정식에 관한 짧은 논문이 1830년에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이론에 확실한 근거가 된 결과를 낳았다. 그가 결투하기 전날 밤, 십중팔구 살해되리라고 믿은 그는 한 친구에게 학술상의 유언장을 썼다. 이 유언장은 발표되지 않은 발견중의 일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후에 몇몇 위대한 수학자에 의하여 군론에 포함된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소위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이라 불린다. 군론 개념에 기초를 둔 방정식의 갈루아 이론은 유클리드 도구만을 가지고 기하학적 작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한, 그리고 근에 대한 대수방정식의 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기준을 제공한다.

갈루아는 본질적으로 군(Group)의 연구를 창시하였으며, 군이라는 말을 최초로(1830년) 사용하였다. 군론에 대한 연구는 그 후 코시와 후계자들에 의하여 치환군의 특별한 형태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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