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5. 10:47

코발레프스키(Sonja Kovalevsky, 1850-1891)

728x90

코발레프스키(Sonja Kovalevsky, 1850-1891)

후에 소냐 코발레프스키(Senja Kovalevsky>로 알려진 소피아 코르빈 크루코프스키(Senja Korvin-Kovalevsky)는1850년 모스크바의 터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7세 때 성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그 곳 해운학교 선생과 미적분학을 공부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대학교 진학이 금지되자, 부모의 해외유학 반대를 벗어나기 위하여 마음이 맞는 (후에 저명한 고생물학자가 된)불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와 이름뿐인 결혼을 했다. 1868년 견혼하여 그 이듬해 봄에 부부는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코발레프스키는 쾨니히스베르거(Konigsberger)와 레이몽드(du Bois-Reymond, 1831-18890)의 수학강좌와 키프히코프(Kirchhoff, 1824-1887)와 헬름홀츠(Helmbolz, 1821-1894)의 물리학 강좌을 수강했다. 쾨니히스베르거는 베를린 대학교의 바이어슈트라스의 초기 제자였고, 그의 선생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코발레프스키는 그 위대한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1870년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여학생은 배제한다는 대학교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바이어슈트라스와 접촉하였고, 그는 쾨니히스베르거의 강력한 추천 때문에 개인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코발레프스키는 곧 바이어슈트라스가 총애하는 학생이 되었고, 그는 그의 대학 강의를 그녀에게 반복하였다. 그녀는 바이어슈트라스의 칭찬을 받으며 4년 동안(1870-1874) 그의 밑에서 공부하여 대학 과정의 수학공부를 다 했을 뿐만 아니라 3편의 귀중한 논문도 썼는데, 한 편은 편미분방정식의 이론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제3 종의 아벨적분의 축약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 한 편은 새턴 환의 형태에 관한 라플리스의 연구를 보완하는 것이었다.

1874년에 소냐 코발레프스키는 피텅겐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편미분방정식에 관한 신사논문의 질이 매우 높아서 구두 시험을 면제받았다. 1888년 38세의 나이로 <고정점을 중심으로 한 고체의 회전문제에 관하여, On the Problem of the Rotation of a Sohd Body about & Fixed Point>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학술원으로부터 유명한 보르딘 상을 수상하는 커다란 영광을 안았다. 제출된 15편의 논문 중에서 코발레프스키의 것이 넌연 최고로 판정되었으며, 너무 뛰어난 논문이어서 상금이 3000프랑에서 5000프랑으로 올랐다.

1884년부터 1891년 죽을 때까지 코발레프스키는 스톡홀름 대학교의 고등 수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녀의 좌우명은 "아는 것을 말하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행하라, 가능성 있는 것을 성취하라."였다. 

반응형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