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 (Isaac Newton, 1642-1727)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뉴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그래서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 ,La geomerrie>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Clavis>,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월리스의 <무한의 수론, Arithmetica infinitorum>을 읽었다. 이런 수학잭들을 읽고 난 후 수학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23세 때인 1665년 초에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알아냈고,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流率法)을 만들었다. 그해와 이듬해 동안 런던에 선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서 울즈돕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미분학을 곡선의 임의의 점에서의 접선과 곡률반경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또한 다양한 물리학 문제에 흥미를 갖고 광학에 관한 첫번째 실험을 하였으며 만유인력이 기본 원리를 공식화하였다.
뉴턴은 166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2년 동안 광학 연구에 매달렸다. 1669년 배로가 뉴턴을 위하여 루카스 교수직을 사임함으로써 18년간의 대학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논쟁을 싫어하여 그의 발견들은 발견한 후 오랫동안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발표를 미루는 습관 때문에 나중에 미적분학의 발견의 전후에 괸련하여 라이프 니츠와 점잖치 못한 논쟁을 겪게 된다. 이 논쟁 때문에 뉴턴을 지도자로 지지하는 영국 수학자들은 대륙과의 수학 교류를 단절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졌다.
1673년 부터 1683년까지의 뉴턴의 대학 강의는 대수학과 방정식론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가 달의 운동에 대한 연구와 관련하여 지구의 반지름의 새로운 측정법을 사용함으로써 만유인력 법칙을 증명한 때가 바로 이 시기인 1679년이다. 그는 또한 태양과 행성을 무거운 질점(質点) 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만유인력 법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과 양립함을 확증하였다. 1703년 영국 학술원장에 피선되어 매년 재선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고 1705년에는 나이트 직위를 받았다. 그는 1727년 84세의 나이에 만성적이고 고통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뉴턴의 가장 위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이 <프린키피아>인데, 거기에는 완전한 역학계와 천체 운동현상의 완전한 수학적인 공식화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과학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책임이 분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유율법에 의하여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리들은 군데군데 약간의 단순한 극한 개념을 써서 순전히 고전적인 그리스 기하학을 이용하여 중명되었다는 점이다. 상대성 이론이 발견되기전까지 모든 물리학과 천문학은 뉴턴이 이 책에서 만든 좌표계의 가정 위에 세워졌다.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난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중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하였는데 그는 곡선족의 직교궤도를 구하여 풀었다.
뉴턴은 숙련된 실험가이자 뛰어난 분석자였다. 수학자로서 그는 거의 전 분야에서 이제까지 배출된 학자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수학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아마 어느 누구도 결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태초부터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의 위대성에 관한 많은 증명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라그랑주는 "뉴턴은 최상의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단지 한 번만 우주의 체계를 세울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찬사에 비하여 자기 업적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나는 진리의 거대한 바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체 내 앞에 놓여 있는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선배들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하였다.
뉴턴은 가끔 하루에 18 내지 19시간을 집필하였고, 놀랄 만한 집중력을 가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넋이 빠지는 것을 입증하는 꾸며낸 듯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뉴턴이 몇몇 친구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할 때,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방에서 나갔다가 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자기가 왜 나왔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중백의를 걸쳐 입고 교회당으로 가버렸다.
또 한 일화로 뉴턴의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닭요리로 저녁을 먹기로 그를 방문하였다. 뉴턴은 외출중이었으나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이 뚜껑 덮힌 접시에 차려져 있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약속시간을 너무 지체하였고 스턱켈리 박사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 닭요리를 먹고 나서 뼈를 뚜껑 덮힌 접시에 담아 놓았다. 뉴턴이 나중에 와서 친구와 인사하고 식탁에 앉아서 뚜껑을 열었으나 뼈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다 먹었다는 것을 잊었군."이라고 말했다.
또 한 일화로, 어느날 뉴턴이 그란담으로부터 말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을 때 마을 건너편에 있는 스피틀리게이트 언덕을 오르려고 말에서 내렸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말이 미끄러 떨어졌는데도 빈 고삐만이 손에 끌려 가고 있는 것을 뉴턴을 몰랐다. 언덕꼭대기에 올라서 다시 말 안장 위로 뛰어 오르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뉴턴은 그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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