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5. 11:48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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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1596년 트루(Tours) 근교에서 태어나서 여덟 살 때라 플레쉬에 있는 예수회 학교로 보내졌다. 바로 거기에서 (처음에는 몸이 약해서)그의 평생 습관이 된 아침에 늦게 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버릇이 길러졌다. 후에 데카르트는 아침 휴식중의 명상시간을 가장 생산적인 시간으로 여겼다. 1612년 데카르트는 학교를 떠나 곧장 파리로 가서 메르센과 미도르주와 더불어 얼마간 수학연구에 전념했다. 1617년 그는 오렌지공 모르스 왕자의 군대에 입대하여 몇 년간의 군생활을 시작했다.

군생활을 마치자마자 독일,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4,5년을 보냈다. 몇 년동안 파리에 다시 정착해 있으면서 수학연구와 철학적 명상을 계속하였으며 한동안 광학기구를 제조하기도 하다가 당시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네덜란드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거기서 20년간 살면서 철학, 수학, 과학에 몰두했다.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를 받고 마지못해 스웨덴으로 갔다. 몇 개월 후 폐렴에 감염되어 1650년 초에 스톨홀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철학자이며 수학자는 스웨덴에 묻혔으며, 유품을 프랑스로 옮기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데카르트가 죽고난 17년 후에 오른손 뼈를 제외한 유골은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 있는 지금의 판테온에 다시 안장되었다. 오른손 뼈는 당시 유골의 수송을 맏았던 프랑스 재무장관이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저술을 완성한 것은 네덜란드에서 20년간 체유하는 동안이었다. 우주에 대한 물리적 설명서인 <천체론, Le monde>을 집필하는 데 처음 4년을 보냈으나, 교회측이 갈릴레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신중히 고려한 끝에 포기하고 미완성인 채로 놔두었다. 그는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r chercher la verite dans les sciences> 이라는 제목의 모든 과학에 관한 철학적 논문의 집필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 책은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부록을 달고 있다. <방법서설>은 부록과 함께 1637년에 출간되었으며, 해석기하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공헌은 세 권의 부록 중 마지막 권에 나타나 있다.

<방법서설>의 유명한 세 번째 부록인 <기하학, La geometrie>은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며, 그 자체가 세 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권은 대수적 기하학의 약간의 이론을 설명하고, 전 그리스 시대에서의 발전상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한 변수는 임의의 선분의 길이에, 두 변수의 곱은 직사각형의 넓이에, 세 변수의 곱은 직육면체의 부피에 대응시켰다. 그리스 시대에서는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던 반면에 데카르트는 X2을 넓이라기보다는 1:X=X:X2의 비례에서 네 번째 항으로 생각하고, X를 알 때 쉽게 계산될 수 있는 적당한 선분의 길이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안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단위선분을 이용하여 한 변수의 몇 제곱이나 몇 개의 변수의 곱을 선분의 길이로 나타낼 수 있고, 변수값이 정해재면 유클리드 도구를 사용하여 실제로 선분의 길이를 그릴 수 있다.

데카르틀가 해석기하학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몇몇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 하나는 꿈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1616년 11월 10일 성 마틴 이브에 다뉴브 강둑 위에 있는 군대의 겨울막사에서 야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전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그가 말하는 기이하고 생생하며 조리 있는 몇 편의 꿈을 꾸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꿈들이 인생에 있어서 목표를 명확히 해 주고, "경이로운 과학"과 "놀라운 발견"을 밝히는 데 그의 미래의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해 주었다. 데카르트는 무엇이 경이로운 과학이며 훌륭한 발견인지는 결코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해석기하학 또는 대수학의 기하학에의 응용,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방법의 기하학에의 적용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착상의 일부를 <방법서설>에 상술했다. 다른 이야기는, 뉴턴의 떨어지는 사과 이야기와 같이, 데카르트가 천정을 기어다니는 파리를 보고 해석기하학에 대한 착상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파리의 경로는 인접한 두 벽으로부터 파리까지의 거리를 연결시키는 관계만 알면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비록 출처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상당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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