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c, 1749-1827)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1749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서 일찍이 좋은 교사직을 얻었고, 정치적인 기회주의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불확실한 기간 동안 정권을 잡는 어떤 정당에라도 비위를 맞추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천체역학, 활률론, 미분방정식, 측지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기념비적인 두 작품, <천체 역학론, Traite de mecenique Celeste>(5권 1799-1825)과 <활률의 해석적 이론, Theorie analytique des probailites> (1812)을 발표하였는데, 각각 해박한 비전문가적인 해설이 붙어 있다. 그에게 '프랑스의 뉴턴'이란 별칭을 붙여준 다섯 권으로 된 <천체 역학론>은 라플라스 자신의 업적과 함께 그 이전의 모든 발견을 포함했고, 이로 인해 라플라스는 이 분야에서는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거장이 되었다. 이 논문과 관련해서 종종 말해지는 몇몇 일화를 다시 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나폴레옹이 그의 논문에 신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까다로운 지적을 했을 때 라플라스는 "폐하, 저는 그 가설이 필요치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미국의 천문학자 나다니엘 보우디취는 라플라스의 논문을 영역할 때 "나는 라플라스 가 '따라서 그것은 명백하다'고 한 부분을 여러 시간 힘들여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여 왜 그것이 명백한 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라플라스의 이름은 우주 발생의 성운설, 퍼텐셜 이론의 소위 '라플라스 방정식(이 어느 것도 라플라스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소위 '라플라스 변환' 그리고 행렬식의 '라플라스 전개'와 연관되어 있다. 라플라스는 뉴턴이 죽은 지 꼭 100년 후인 1827년에 죽었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아는 것은 미미하고 모르는것은 무한 하다."였다.
라플라스에 관한 다음 이야기는 흥미롭고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귀중한 충고를 제공해 준다. 라플라스가 젊어서 수학 교수직을 얻기 위하여 파리게 도착했을 때 저명한 사람이 쓴 추천서를 달랑베르에게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라플라스는 역학의 일반원리에 관한 재치 있는 편지를 달랑베르에게 썼다. 이것이 취직의 문을 열어 주었고 달랑베르는 "귀하는 내가 당신의 추천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을 아셨군요. 당신은 자신을 더 잘 소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군요." 라고 답장하였다. 며칠 후 라플라스는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의 수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종종 서로 대조를 이루곤한다. 무엇보다도 볼(W.W.Rouse Ball)이 다음과 같이 요약했듯이 그들의 방식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라그랑주는 형식과 내용 둘 다에 완벽하고 신중하게 전개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의 논증은 일반적이지만 이해하기 쉽다. 반면에 라플라스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과정에 무관심하며, 그의 결과가 옳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며 그것을 증명하지 않거나 틀리게 증명하여 방치한다." 또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학에 대한 견해에서도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라플라스에게 수학은 단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이고 라그랑주에게는 하나의 빼어난 예술이고 그 자체가 존재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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