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7. 15:0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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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rm Leibniz, 1646-1716)

 

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berm Leibniz)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보통교과서를 다 공부하여 수학, 신학, 철학, 법학의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 characteristica generalis> 의 첫번째 착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George Boole, 1815-1864)의 기호 논리로 꽃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ematica>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젊다고 하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법학박사학위를 거절 당한 그는 뉴렘베르크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그는 역사적 방법에 의한 법 교육에 관한 탁월한 글을 써서 마인츠 체후에게 헌납했다. 이 일로 해서 마인츠 제후는 그를 법령 재편찬위원회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사관원으로 보내게 되는데, 처음에는 마인츠 제후를 위해 1676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하노비에서 브룬스빅 공의 지위를 위해 봉사했다.

1672년 외교적 업무로 파리에 있을때 라이프니츠는 그 곳에 살고 있던 호이겐스를 만났는데, 이 젊은 외교관은 그 과학자를 설득하여 자기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라이프니츠는 정치적 임무를 띠고 런던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곳에서 올덴버그와 사귀었으며 영국학 술원에 계산기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브룬스빅 공의 사서라는 유리한 직책에 취임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이미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를 발견하고 이 주제에 관한 개념의 대부분을 개발하였으며, 미분법의 수많은 기본 공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7년간은 미적분의 발견에서 뉴턴과 독립적으로 했느냐에 관해 뉴턴 사이에서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논쟁으로 해서 한층 비참하게 되었다. 1714년 그의 군주는 최초로 영국의 게르만 왕이 되었으나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남겨저 무시되었다. 2년 후인 1716년에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단지 그의 충실한 시종만이 참석하였다고 전해진다.

라이프니츠는 천부적으로 낙천주의자였다. 자기 생애 동안 대립하는 종파를 하나의 일반적인 교회로 재결함시키려는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진 상술의 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에 의하여 전 중국을 기독교화하는 방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느꼈다. 신은 1로 무는 0으로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진법에서 모든수가 0과 1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은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것을 창조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매우 흡족한 라이프니츠는 그생각이(특히 과학을 좋아했던) 중국의 현 황제와 나아가 중국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중국 수학위원회 위원장인 예수회 수사 그리말디에게 그것을 알렸다. 라이프니츠의 종교적인 환상의 또 다른 예는 허수가 기독교 성경의 성령-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쯤이 양서류의 일종과 닮았다고 한말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이 재능에 대한 마지막 찬사로 라이프니치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연속과 이산이라는 수학적 사고의 넓고 대조적인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수학의 역사에서 사고의 이 두 가지 성질을 완전하게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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