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
라그랑주는 이탈리아 튜린의, 전에는 부유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배경을 가진 가문에서 태었으며, 11명의 형제중 막내였고, 성년이 되도록 생존이 유일한 아이였다. 튜린에서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그 곳 시관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복무했다. 1766년 오일러가 베를린을 떠났을 때 프레더릭 대체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그의 궁정에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라그랑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그랑주는 그 초청을 받아들여서 오일러가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새로 설립된 에콜 노르말, 그 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전자의 학교는 얼마 안 있어 없어졌지만 후자의 학교는 많은 현대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들이 그 곳에서 공부하고 그 곳에서 교수직을 가졌지 때문에 수학사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말년에 라그랑주는 고독과 절망감에 매우 시달렸는데 그는 56세 때 그보다 거의 40세 가까이 어린 소녀를 만나 사귀기 시작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친구인 천문학자 레모니에(Lemonnier)의 딸이었다. 그의 불행을 자주 접한 그녀는 그에게 매우 헌신적이고 적임인 친구였으며 남편을 위로하여 살고 싶은 욕망을 일깨워 주는 아내였다.
세상에서 받은 상 중에서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부드럽고 헌신적인 어린 아내라고 그는 정직하고 순수하게 주장했다.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시도는 1797년 그의 위대한 저서 <미분의 원리를 포함하는 해석함수론, Theorie des fonctions analytiques contenant les principes du calcul differentiel>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주요한 개념은 테일러 급수에 의한 함수 f(x)의 전개식이다.
b에 관한 f(x+b)의 테일러 전개에서 도함수 f´(x), f″(x), ···은b, b/2!···의 계수로서 정의 된다. 오늘날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기f´(x), f″(x),···은 라그랑주가 만든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수많은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와 매우 친밀했던 나폴레옹은 "라그랑주는 수리과학 분야에서 치솟은 피라미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라그랑주에 대한 그의 평가를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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