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일리(Arthur Cayley,1821-1895), 실베스터(Jamcs Joseph Sylvester,1814-1897), 에르미트(Charles Hermite,1822-1901)
케일리는 1821년 서리 주의 리치몬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여 1842년 수학 졸업시험에서 수석으로서 졸업하고, 같은 해 보다 어려운 스미스 상의 수상자를 가리는 시험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여러 해 동안 변호사 일이 수학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면서 법률 공부를 하고 변호사 일을 하였다. 법률 공부를 하는 동안에 더블린으로 가서 해밀턴의 사원수 상의를 수강하였다.
1863년에 케임브리지에 새들러 교수직이 설치되었을 때 그 직을 요청받고 수학하였으며, 법률가로서의 화려한 미래를 포기하고 수수한 학문적 생을 택하였다. 그 결과 모든 시간을 수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캐일리는 수학의 역사상 오일러와 코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양의 수학적 저술을 남겼다. 그는 케임브리지 학부 재학시절부터 저술을 시작하였고, 변호사 일을 하는 동안 200내지 300편의 논문을 썼고 나머지 생애 동안 많은 양의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불변식론을 만들고 발전시킨 일일 것이다. 캐일리의 논문이 엄격하고, 직접적이고 조직적이고 명확한 것을 보면, 변호사 경력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 번 보거나 읽은 것은 무엇이든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또한 대단히 침착하고 점잖은 기질을 지녔다. 그는 '수학자 중의 수학자'로 불려지고 있다.
캐일리의 보통 이상으로 소설을 탐독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행중이니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과 이따금씩 짬이 날 때 소설을 읽었다. 그는 일생 동안 영어로 쓰여진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된 소설까지 수천 권의 소설을 읽었다. 그는 그림 그리기(특히 수채화)를 즐겨했으며, 수채화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한 식물학과 일반적인 자연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캐일리는 순수한 영국 전통의 아마추어 등산가여서 오래걷기와 등산을 하러 대륙으로 자주 여행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등산하는 이유를 매우 힘들고 지치지만 정상을 정복했을 때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거나 복잡한 수학이론을 완성하였을 때에 맛본 매우 상쾌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고, 그러한 느낌은 등산에서 더 쉽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캐일리는 1895년에 죽었다. 그 직후 에르미트는 학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캐일리의 수학적 재능을 명료함과 해석적 형태의 지극한 우아함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코시와 견줄 만한 뛰어난 학자가 되게 한 비길 데 없는 능력으로 보강되었다."고 하였다.
제임스 조지프 실베스터는 1814년 런던에서 여러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의 성은 원래 조지프였으나 장손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성 실베스터를 사칭하여 나머지 가족도 그것을 받아 들였다. 미국에 살던 그의 형은 보험계리사였는데, 미국의 복권청부업회 이사에게 그들이 골치를 석이는 복급조절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겨우 16세인 동생 제임스에게 의뢰하기를 제안하였다. 실베스터의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문제 해법에 감탄한 이사는 젊은 수학자에게 상금으로 500달러를 주었다.
실베스터는 1883년에 케임브리지의 성 존스 칼리지에 입학하고, 6년 후 수학 학위시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 1838년에서 1840년 까지 런던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나서 1841년에 미국의 버지니아 대학교 수학교수가 되었으나 학생 두명과의 불화로 인해 단 몇 개월만에 그만두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보험계리사로 일하였으며 1850년에 변호사가 되었다. 캐일리와 사귀게 된 때는 1846년이었다.
실베스터는 1855년에서 1870년까지 울위치의 영국 육군사관학교의 수학교수로 있었다. 1876년에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수학교수로 미국에 돌아와서 1878년 미국수학회지의 초대 편집인이 되어 매우 행복하고 성과가 많은 7년을 보냈다.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재직시에 알벨함수에 관한 일련의 강의에 캐일리를 초청했는데, 실베스터 자신도 그 강의에 참석하였다. 1884년 실베스터는 올스퍼드 대학교의 기하학 새빌리아 교수직을 얻었다. 그는 1897년 83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죽었다.
실베스터의 초기 수학논문은 프레즈넬의 광학이론과 스털의 정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 후 캐일리의 영향을 받아 현대 대수학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학의 아담'(The Adam of Mathematics)으로 알려질 정도로 괸장히 많은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내면서 수학용어에 광범위한 기여를 하였다.
대수학과 해석학 모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유능한 프랑스 수학자 에르미트(Charles Hermite)는 캐일리와 실베스터의 연구의 대부분을 계승하고 확장시켰다. 에르미트는 1822년 로렌의 디오제에서 태어나고, 처음에는 루이-르-그랑 중·고등학교에서, 후에는 잠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는 등 일정하지 않은 교육을 받은 후, 1848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학시험관이며 퀴즈 선생이 되었다.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및 소르본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897년 정년 때까지 소르본에 있었다. 그는 1901년 파리에서 죽었다. 에르미트의 업적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두 가지 근본적인 수학적 결과는 1858년에 타원함수를 써서 구한 일반적인 5차방정식의 해법과 1873년에 보인 e가 초월수라는 증명이다.
에르미트는 오른쪽 다리가 불구인 채 태어나서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절름발이였다. 이 결함으로 인하여 덕을 본 것은 어떤 형태의 군복부도 면제되었다는 것이고, 손해 본 것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1년 지난후 그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제공 받을 수 있는 어떤 직장에도 맞지 않는다는 학교 당국의 주장으로 더 이상의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불구이고, 일찍이 적당한 직장을 얻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도록 만든 매우 쾌활한 성품을 지녔다. 수많은 수학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후배에게 커다란 관용을 베풀어 왔는데, 에르미트는 의심할 바 없이 전 수학사를 통틀어 이런 유의 가장 훌륭한 인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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