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트(Francois Viete, 1540-1603)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는 프랑수아 비에트(Francois Viete)로서 흔히 그를 라틴어 이름인 비에타(Vieta)라고도 부르는데 그는 고등법원 판사로 일하면서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수학에 몰두했다. 그는 1540년에 퐁테네(Fontenay)에서 태어나서 1603년에 파리에서 죽었다. 비에트에 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베네룩스제국(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방)대사가 앙리 4세(Henry Ⅳ)에게 다음과 같이 큰소리쳤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1593년에 우리나라의 아드리아누스 로마누스(Adrianus Romanus, 1561-1605)가 제시한 45차방정식의 근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비에트가 그 자리에 출두되었고 그의 앞에 로마누스의 방정식이 놓아졌다. 기초적인 삼각법을 이해하고 있었던 비에트는 단 몇 분만에 두 개의 근을 찾았고 그 뒤에 21개의 근을 더 찾았다. 그러나 그도 음근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비에트가 로마누스에게 아폴로니우스의 문제를 풀어보라는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로마누스는 유클리드 도구만을 가지고는 해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비에트의 우아한 해를 본 후에 비에트를 만나기 위하여 퐁테네를 방문했고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따뜻한 우정이 맺어졌다. 또 비에트는 스페인과 전쟁중에 수백개의 문자로 된 암호문을 해독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가 2년동안 전쟁에서 유리한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자 스페인의 필립 2세(Philip Ⅱ)는 그 암호문이 절대로 해독될 수 없는 것으로 믿은 나머지 교황에게 프랑스가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위배하여" 악마를 고용했다고 불평했다. 비에트는 수학에 일단 몰입하면 서재에서 며칠 동안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비에트는 삼각법, 대수, 기하학 등에 관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학 요람, Canon mathematicus seu ad triangula>(1579)
<해석학 서설, In artem analyticam isagoge>(1591)
<보 기하학, Supplementum geometriae>(1593)
<방정식의 수학적 해법, De numerosa potestaum resolutione>(1600)
<방정식의 재검토와 수정, De aeguationum recognitione et emendatione>(이는 비에트가 죽은 후 1651년에 출간되었다.
비에트는 뛰어난 대수학자였으므로 그가 기하학에 대수와 삼각법을 응용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고대의 3대 작도문제 중 각의 삼등분과 배적의 문제가 3차방정식의 해법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문제들의 연구에 진일보를 가져다 주었다. 8절에서 이미 비에트의 n의 계산값과 또 2/π로 수렴하는 흥미로운 무한적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으며 6-4절에서는 그가 아폴로니우스의 분실된 저작<접촉론>의 재현을 시도했었음을 얘기한 바 있다.
1594년에 비에트는 그레고리력(서양신력)에 대한 클라비우스(Clavius)와의 격심한 논쟁으로 인하여 약간의 나쁜 평판을 얻었다. 이문제에서 비에트의 태도는 완전히 비과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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