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Johann Kepler,1571-1630)
케플러는 1571년 슈투트가르트 근교에서 태어났고 원래 루터교의 목사가 되려고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으며 20대 초반인 1594년 오스트리아 그래츠 대학교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1599년에 케플러는 유명하나 싸우기 좋아하는 덴마크계 스웨덴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che)의 조수가 되었는데, 브라헤는 루돌프 2세 황제의 왕실 천문학자로 임명되어 프라하로 이주했다.
얼마 후인 1601년에 브라헤가 갑자기 죽어서 케플러는 그 스승의 지위와 행성 운동에 관한 방대하고 매우 정확한 천문학적인 자료들을 물려받았다.
그는 21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열성과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여 성과 없는 시도를 수없이 하였고, 계산으로 많은 분량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마침내 1609년에 그는 행성운동의 처음 두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10년 후인 1619년에 세 번째 법칙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행성운동의 법칙은 천문학과 수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뉴턴이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현대 천체역학을 창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법칙은 다음과 같다.
Ⅰ.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따라 태양의 둘레를 돈다.
Ⅱ. 행성과 태양을 잇는 동경은 동일한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을 그린다.
Ⅲ. 행성이 자신의 궤도를 완전히 한 바퀴 도는 시간의 제곱은 궤도의
반장축의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브라헤의 기록으로부터 이 법칙을 경험적으로 발견한 것은 과학에서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괄목할 만한 귀납법 중의 하나이다.
케플러의 역작들은 종종 매우 신비스러운 공상과 과학적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결합에 의한 산물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이 세속적인 불행의 연속에 의해 거의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졌던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는 겨우 네 살 때 천연두에 걸려 시력을 대부분 잃었다. 전반적으로 병약한 일생을 보낸 데다가, 환희 없는 청년기를 보냈고 결혼은 끊임없는 불행의 근원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천연두로 죽었고, 아내는 미쳐서 죽었다. 도시가 카톨릭(교도들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때 그래츠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하였으며, 어머니는 마법을 쓴다고 고발, 투옥되어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감옥으로부터 구해내려고 노력하였고, 자신은 가까스로 이단 선고를 피하였으며 봉급은 항상 체불되었다.
어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 번째 결혼에서 아내를 잘못 선택하지 않으려고 11명의 처녀들의 장ㆍ단점을 미리 주의깊게 검토 하였지만, 두 번째 결혼은 첫번째 보다 더 불행했었다고 한다. 그는 별점을 쳐주며 생계를 유지하였고, 1630년에 지불 기일을 넘긴 지 오래되는 약간의 봉급을 받으러 가는 도중에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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