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Augustin-Louis Cauchy,1789-1857)
코시는 1789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초기의 교육은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후에 판테온의 에콜 상트랄(Ecole Centrale, 국립공업고등학교)에서는 고전 연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05녀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의 칭찬을 독차지하였다. 2년 후 토목학교(Ecole des Ponts et Chaussées)에 입학하여 토목기사가 될 준비를 하였다.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의 설득으로 토목공학을 포기하고 순수과학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강사직을 수락하였다. 코시는 순수와 응용수학 모두에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논문을 썼는데, 그의 저술의 양은 아마 오일러 다음으로 많을 것이다. 수집된 그의 논문은 여러 권의 책 외에 논문이 789편에 이르렀는데 일부는 매우 방대하여 사절판 책으로 24권 분량이나 되었다. 이 책은 내용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코시는 (가우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과다한 발표와 경솔한 저작에 대하여 비판받아 오고 있다. 코시의 다작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1835년 과학원은 학술지
코시는 무한급수의 수렴과 발산에 관한 연구, 실함수와 복소수 함수론, 미분방정식, 행렬식, 확률론, 수리물리 등에서 수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미적분을 배우는 학생들은 양항 급수의 수렴 발산에서, 소위 코시의 근판정법과 코시의 비율판정법 그리고 주어진 두 급수의 코시 곱 등을 만나게 된다. 또한 복소함수론의 첫학기 강의에서 코시 부등식과 코시 적분공식, 코시의 적분 정리, 기초 코시-리만 미분방정식을 만나게 된다. 18세기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적분은 미분의 역으로 취급된 반면, 코시는 정적분을 거의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무시할 만큼 작은 부분들의 무한히 증가하는 집합의 합의 극한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그러고 나서 적분과 역도함수 사이의 관계를 평균값 정리에 의하여 입증하였다.
코시는 1812년 8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으로 시작된 행렬식 이론에 대한 업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장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이 되었다. 코시가 다음의 중요하고 유용한 정리를 처음 증명한 것은 바로 1812년의 논문에서였다.
『만일 Α와Β가 모두 n X n행렬이면 ㅣABㅣ=ㅣAㅣㅣBㅣ이다.』 또한 방정식ㅣΑ-λIㅣ=0을 행렬A의 특성 방정식(characteristic equation)이라고 부름으로써 1840년에 '특성(characteristic)'이란 말을 행렬이론에 도입한 사람이 바로 코시였다.
코시는 논문을 엄밀하게 하려고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 영향으로 다른 수학자들도 분별 없는 형식적인 조작과 직관적인 증명은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코시는 68세인 1857년 3월 23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는 쉬면서 기관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시골로 갔으나 치명적인 발열에 의하여 쓰러졌다. 죽기 직전 파리의 아르키조(Archbishop)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가 아르키조에게 한 마지막 말은 "사람은 죽어도 그의 행적은 남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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