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5. 11:28

달랑베르(1717-1783)

728x90

달랑베르(1717-1783)

달랑베르(Jean-le-Rond d'Alembert,1717-1783)는 클레로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태어나서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갓난아이 때 성 장-르-롱(Saint Jean-le-Rond)교회 근처에 버려졌는데, 거기에서 한 헌병이 발견하여 그 지명을 이름으로 하여 서둘러 세례를 받게 하였다. 달랄베르는 후에 덧붙여졌다. 달랑베르와 클레로는 종종 적의가 있는 과학적인 경쟁을 했다. 24세의 나이에 달랑베르는 프랑스 학술원에 들어갔다.

1743년에 현재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동역학의 중요한 원리에 기초를 둔 논문인 <역학 이론, Traite de dynamique>을 발표했다. 달랑베르는 해석학의 기초에 관심을 보였다. 1754년 해석학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확실한 극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제안을 하였으나 대부분의 동시대 인은 그의 제안에 거의 받아 들이지 않았다. 달랑베르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달랑베르의 정리로 알려진 대수학의 기본 정리(복소 계수를 가지는 1차 이상의 모든 대수방정식 f(x)=0 은 적어도 하나의 복소 근을 가진다)를 증명하려고 매우 열심히 연구하였다.  미분방정식을 리카티 미분방정식이라 명명한 사람도 바로 달랑베르였다.
달랑베르도 오일러처럼 법률, 의학, 수학, 과학에 뛰어난 지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많은 공동 관심사를 지닌 두 사람은 서로 수 많은 주제에 관하여 서신 왕래를 했다.

1754년 달랑베르는 프랑스 학술원의 종신 서기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생애를 디드로(cenis Dideror)와 함께 시작한 유명한 프랑스 대 백과사전 일에 몰두했다. 달랑베르는 오일러가 죽은 해인 1783년 죽었다.

달랑베르가 한 말 중 유명하고 자주 인용되는 말(때때로 기초 대수강의에서 인용할 가치가 있는)은 "대수는 관채하여 종종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이다. 그는 또한 언젠가 "기하학적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물리학적 사실과 점근적이다. 즉 후자는 전사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않고 무한히 가까이 접근한다." 고 적절하게 언급했다. 아마도 수학에 관한 다랑베르의 논평 중 가장 통찰력있는 것은 다음일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살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보존 이외의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유쾌한 예술의 장려보다 정밀 과학의 연구를 더 좋아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전자에 뛰어나려고 마음먹는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이고 후자에 전념하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나는 무인도에서 시인은 거의 쓸모가 없는 반면에 수학자는 여전히 발견의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반응형

'수학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자르그(Gerald Desargue, 1593-1662)  (0) 2019.01.25
람베르트(1728-1777)  (0) 2019.01.25
클레로(1713-1765)  (0) 2019.01.25
뉴턴 (Isaac Newton, 1642-1727)  (0) 2019.01.25
뇌더(Amalie Emmy Noether, 1882-1938)  (0) 2019.01.25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