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5. 12:11

디리클레(Peter Gustav Lejeunc Dirichlet,1805-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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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리클레(Peter Gustav Lejeunc Dirichlet,1805-1859)

 

디리클레는 1805년 뒤렌에서 태어났고,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교수직을 계속해서 역임했다. 1855년 가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가우스 후임으로 괴팅겐의 교수로 인명되었는데, 이것은 전에 가우스의 제자였고 평생 스승을 존경한 매우 재능 있는 수학자에 대한 알맞은 예우였다.

괴팅겐에 재직하는 동안 가우스의 미완성 연구를 끝내려 했으나, 1859년에 요절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독일어와 프랑스에 능통한 디리클레는 두 나라의 수학과 수학자 사이의 섭외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그의 가장 각광받는 수학적 업적은 아마도 함수개념을 일반화 시키게 만든 작업인 푸리에 급수의 수렴에 관한 예리한 분석일 것이다. 그는 가우스의 보다 난해한 방법 중의 일부를 쉽게 이해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그 자신의 정수론에 뚜렷한 기여를 하였는데, 그의 멋진 <정수론 장의, Vorlesungen uber Zahlentheorie>는 아직도 가우스의 정수론 연구의 가장 명쾌한 입문 중의 하나이다. 디리클레는 야코비의 절친한 친구이자 해설가이며 양아들이었다. 그의 이름은 수학전공 학생들에게 디리클레의 급수, 디리클레 함수와 디리클레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디리클레와 그의 위대한 스승 가우스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가우스 박사 학위를 받은 만 50년 후인 1849년 7월 16일 괴팅겐에서 50주년 축하를 받았다. 축하행사의 진행 도중의 어느 시점에서 가우스가 그의 <수론 연구>의 원본 한 장으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디리클레는 그것이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싹해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대담하게 가우스의 손에서 논문을 빼앗아 일생 동안 기념으로 보관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편집자가 그의 논문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디리클레는 고결하고, 성실하고, 인간적일고, 겸손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야코비와는 달리 젊은 사람들의 심정을 헤라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디리클레의 아들이 그의 선택받은 아버지로부터 항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급우들이 부러워했을때, 아들은 다음과 같은 가엾은 대답을 했다. "오! 우리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다." 디리클레의 장난꾸러기 조카 엥제는 자서전에서 국민학교에 다니던 6,7세 때 삼촌에게 받았던 수학교육은 그의 생에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다고 썼다.

디리클레는 가족들과 편지 왕래하는 일에 매우 미지근하였다. 그는 첫 아기를 얻었을 때, 영국에 살고 있던 장인에게 편지하는 것을 잊었다. 나중에 알게 된 장인을 디리클레가 적어도 2+1=3이라고 쓸수는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재치 있는 장인이 다름아닌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이자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인 에이브러햄 멘델스존이었다. 디리클레의 뇌는 가우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괴팅겐 대학의 생리학과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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