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5. 16:42

베르누이 일가(The Bernoulli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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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누이 일가(The Bernoulli family)

수학과 과학의 영사에서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는 17세기 후반부터 유능한 수학자와 과학자를 보통 이상으로 많이 배출한 스위스의 베르누이 가문이다. 두 형제 야곱 베르누이(Jakob Bernoulli, 1654-1750)와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1667-1748)로부터 시작되다. 이 두 사람은 라이프니츠의 논문이 <학술기요, Acta eruditorum>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이전의 직업적인 관심사를 포기하고 수학자가 되었다.

그들은 미적분학의 놀랄만한 위력을 깨닫고 다양한 문제에 그 도구를 적용한 최초의 수학자들에 속한다. 야곱은 1687년 그뢰닝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705년 야곱이 죽자 형의 바젤 대학의 교수직을 승계받아 나머지 생애 동안 그 직에 있었다. 두 형제는 종종 격렬한 경쟁자로서 라이프니츠와 또 서로서로 각자의 의견을 교환했었다.

야곱 베르누이는 분법을 연구한 최초의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수학적 확률을 최초로 공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 분야에 관한 책인 <추측술, Ars conjectandi>은 그가 죽은 후인 1713년에 발간되었다. 현재 야곱 베르누이의 이름을 지닌 수학적 내용들이 여러 개 있다. 이들 중에는 통계학과 확률론의 '베르누이 분포'와 '베르누이 정리'미분방정식의 첫 학기 강의에서 마주치는 '베르누이 방정식' 정수론의 '베르누이 수'와 '베르누이 다항식' 그리고 미적분학의 첫 학기 강의에 나오는 '베르누이의 연주형'(lemniscate) 등이 있다. 1690년 <학술기요, Acta eruditorum>에 발표된 등속상하고선 문제에 대한 야곱 베르누이의 풀이에서 최초로 '적분'(integral)이란 단어가 나온다. 라이프니츠는 적분을 '합분법'(calculus sumrnatorius)이라 불렀는데, 1696년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는 그것을 '적분법'(calcutus integralis)이라 부르기로 동의했다. 야곱 베르누이는 등각나선이 다양한 변화하에서도 그 자체를 재생성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아르키메데스를 모방하여 그의 묘비에 이 나선을 "Eadern mutata resurgo"(나는 변하지만 똑같이 일어설 것이다)라는 비문과 함께 새기기를 요청했다.

요한 베르누이는 그의 형 야곱보다도 더 수학에 풍부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질투심이 많고 심술궂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 시대에서 가장 성공한 선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적분학을 많이 보충하였고 유럽 대륙에서 이 새 분야의 유용성을 인정하게 만드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로피탈(de PHospital, 1661-17040) 후작이 요한의 면밀한 재정적 동의 아래 1696년 최초의 미적분학 교재를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자료였다. 잘 알려진 0/0꼴의 부정형의 계산법이 후에 미적분학 책에서 로피탈의 정리(PHospiral's rule)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였다.

요한 베르누이는 니콜라스(1695-1726), 다니엘(1700-1782)과 요한 2세(1710-1790)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18세기 수학자와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수학분야에 전도가 유망했던 니콜라스는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 초빙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겨우 8개월 후에 그 곳에서 익사하였다. 그는 곡선, 미분방정식,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가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안한 확률론의 한문제가 후에 페테프부르크 역설(Petersburg paradox)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A는 동전을 던졌을 때 첫번째에 앞면이 나오지 않으면 1페니, 두 번째가지 앞면이 나오지 않으면 2페니, 세 번째까지 앞면이 나오지 않으면 4페니 이렇게 계속하여 받기로 하였을 때 A의 기대값은 얼마인가?" 수학적 이론에 의하면 A의 기대값은 무한대인데 이것은 역설적인 결과이다. 그 문제는 성 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스 자리를 계승한 동생 다니엘이 연구하였다. 다니엘은 7년 후 바젤로 돌아왔다. 그는 요한의 세 아들 중 가장 유명하였고 온 정열을 확률론, 천문학, 물리학 및 유체역학에 쏟았다. 확률론에서 개연적 기대값(moral expectation)의 개념을 고안하였고 1738년에 쓴 <유체역학, Hydrodynamica>에는 현재의 초급 물리학 책에 나오는 그의 이름이 붙은 유체역학의 원리가 들어 있다. 세 아들중 막내인 요한 2세는 법률 공부를 하였으니 인생 후반기를 바젤대학교의 수학 교수로서 보냈다.
그는 특히 열과 빛의 수학적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야곱과 요한의 조카인 니콜라스 베르누이(Nicolaus Bernoulli, 1687-1759)가 있었는데 수학 분야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었다. 니콜라스는 한때 갈릴레오가 차지했었던 파두아의 수학 교수직에 잠시 있었다. 그는 기하학과 미분방정식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논문을 썼고 말년에는 논리학과 법률을 가르쳤다.

요한 베르누이 2 세는 아버지처럼 법률을 공부했으나 수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아들 요한 3 세(1744-1807)를 두었다. 그는 겨우 19세의 나이에 베를린 학술원의 수학 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는 천문학, 우연설(doctrine of chance), 순환소수 및 부정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썼다.
선대보다 활약이 적었던 베르누이의 후손들에는 요한 2 세의 다른 두 아들인 다니엘 2 세(1751-1863)그리고 크르스토프의 아들인 요한 구스타브(1811-186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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