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6. 09:29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와 푸아송(Simeon Denis Poisson,1781-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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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와 푸아송(Simeon Denis Poisson,1781-1840)

푸리에는 1768년 오세르(Auxerre)에서 태어나서, 1830년 파리에서 죽었다. 1830년 파리에서 죽었다. 재단사의 아들인 그는 여덟 살 때 고아가 되었고, 베네딕트 회사가 운영하는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후에 여기에서 수학 강사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촉진 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으며 이 공로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몽주와 함께 나 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직을 사임하였다.

1789년에 그는 이집트(Lower Egypt) 지역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1801년 영국이 승리하고 프랑스가 항복함에 따라 푸리에 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그르노블(Grrenoble)의 지사가 되었다. 열에 관한 실험을 시작한 때가 바로 그르노블에 있던 때이다. 1807년 푸리에는 수학사에 있어서 새롭고 결실이 풍부한 장을 여는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하였다. 이 논문은 금속 악기, 판, 덩어리에서의 열의 흐름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이 논문에서 푸리에는 유한 폐구간에서 정의된 임의의 함수는 사인과 코사인함수의 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는 매우 놀라운 주장을 하였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임의의 함수는 구간[-π,π]에서 어떻게 변화하도록 정의되었든 간에 적당한 실수 a,b에 대하여 그 구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급수가 현재 삼각급수(trigonometric series)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수학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성질이 좋은 몇몇 함수들이 이런 급수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음이 이미 알려졌었다. 그러나 푸리에는 [-π,π]에서 정의된 임의의 함수가 그와 같이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원의 석학들은 푸리에의 주장에 대하여 매우 회의 적이었으며 리그랑주, 라플라스, 르장드르에 의하여 심사된 이 논문은 기각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과학원은 푸리에가 그의 착상을 좀더 사려 깊게 발전시키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열전달 문제를 1812년의 대상의 주제로 선장하였다. 푸리에는 수정된 논 문을 1811년 제출하였는데, 전의 세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구성된 심의관에 의하여 심사를 받은 결과 상은 받았으나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 과학원의 논문집에 실리도록 추천받지는 못하였다.

푸리에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이집트에서의 경험과 열에 관한 연구로부터 그는 사막의 열이 건강에 좋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옷을 껴입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운 방에서 살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열에 대한 망상 때문에 죽음을 재촉하여, 63세의 나이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 심장병으로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인용이 많이 되는 푸리에의 말은 (열의 수학적 이론에 관한 그의 초기의 논문에 나오는) "자연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수학적 발견의 가장 풍요로운 원천이다."일 것이다.

푸아송은 1781년 피티비에(Pithiviers) 에서 태어나 1840년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친척들은 어린 푸아송에게 본인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의학을 공부하도록 강요하였다. 어린 푸아송의 교육은 삼촌이 맡았는데, 그는 란셋으로 양배추잎의 옆맥을 찌르는 것부터 시켰다. 그는 이 일에 완벽하게 숙달되고 나서 물집을 따는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혼자 이 일을 하게 된 첫 수술에서 환자가 수시간만에 죽었다.

의사들이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고 위로했지만 더 이상 이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강한 수학적 흥미로 인해 푸아송은 1798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라그랑주와 라플라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졸업과 동시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는 나머지 생애를 여러 행정직과 교수직으로 보냈다. 다소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1815년 정통주의자와 합류하기까지 완고한 공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푸아송의 수학적 저술은 300에서 400을 헤아릴 정도로 많았다. 그의 대표적인 논문은 1811년과 1833년에 발표된 두 편의 <역학론, Traite de meacnique>과 1831년의 <모세관 현상의 새 이론, Theorie nouvelle de l'action capillalre>, 1835년의 <열에 관한 수학적 이론, Theorie mathematique de la chaleur>, 1837년의<재판에 관한 확률연구, Recherches sur la probabilite des jugements>이다.

푸아송이 전문적인 관심 중의 하나를 갖게 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렸을 때 간호사가 그를 돌봐주고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보러 왔을 때, 간호사는 외출 중이었고 그 아이는 벽에 있는 못에 끈으로 매달린 채 있었다. 말하기를 질병과 더러운 바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푸아송은, 그처럼 매달려 있을 때 앞뒤로 흔들리게 한 덕분에 후에 그가 많은 시간 동안 공부한 진자운동과 일찍부터 친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푸아송이 언젠가 "나의 인생은 오직 두 가지, 수학을 연구하는 것과 수학을 가르치는 것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두 가지 목표 모두에서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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