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 / / 2019. 1. 25. 18:09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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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오일러는 170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신학 분야로 발을 디뎠지만 진짜 적성은 수학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학에 흥미를 가졌던 칼뱅교의 목사인 아버지는 그에게 수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아버지는 야곱 베르누이 밑에서 수학을 공부 했었지만 아들은 요한 베르 누이 밑에서 공부하기로 정해졌다. 오일러가 겨우 20세 때인 1727년 표트르 대제가 설립한 성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 관계하고 있던 두 친구 다니엘과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러시아 학술원에 오일러를 위한 자리를 확보했다.

오일러는 다니엘이 바젤의 수학 교수직을 얻은 후 곧바로 러시아를 떠나서 학술원의 수학주임이 되었다.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서 14년 동안의 화려한 활동을 한 후 오일러는 베를린으로 와서 프로이센 학술원을 이끌어 달라는 프레디릭 황제의 초청을 수락하였다. 오일러는 프로이센 학술 원에서 25년 동안 있었으나 순진한 성격 때문에 프레더릭 대제에게 더 충성하려는 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오랫동안 사소한 오해 등을 받았다. 오일러를 매운 존경한 러시아인들은 그가 프로이센 으로 떠난 후까지도 약간의 월급을 계속 지급하였다.

프레더릭 황제의 진영의 냉대와는 대조적으로 러시아인들의 그에 대한 온정으로 오일러 는 1766년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으로 돌아오라는 캐서린 황제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거기에서 그는 나머지 17년의 생애를 보낸 후 1783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일러는 실로 수학사의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그 결과 수학의 각 분야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성페테르부르크 학술원으로 돌아온 직후 불행하게도 완전히 눈이 멀게 되었지만 그의 놀랄 만한 저술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흥미러롭다. 그는 이미 1735년부터 오른쪽 눈을 실명했기 때문에 왜 그의 초상화가 그런 포즈로 그려졌는지 설명해 준다. 눈이 먼것은 수학자에게 극복할 수 없는 장애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베토벤이 이 청각을 잃은 것처럼 오일러가 시각을 잃은 것도 그의 굉장한 창작 활동을 결코 해치지는 못했다. 그는 큰 장애 속에서도 비상한 기억력과 집중력으로 비서가 받아 쓸 수 있도록 구술하고 큰 석판에 불필로 공식을 써서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오일러는 생애 동안 530편의 책과 논문을 발간했고 죽을 때 사후 47년 동안 성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의 회보를 보강하기에 충분한 원고를 남겼다. 886점의 책과 논문 등을 담고 있는 오일러의 저작을 총망라한 기념집을 1909년 스위스 자연과학회에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시절판 7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계획되었다. 그의 소논문 중의 하나에는 다면체의 꼭지점의 개수 v, 변의 개수e, 면의 개수 f사이의 관계식

v-e+f=2

가 나온다. 또 다른 논문에서는 원형곡선(orbiform curves), 즉 원과 같이 일정한 폭을 가지는 볼록 타원 모양의 곡선을 고찰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일곱 개의 다리에서 영감을 얻은) 한붓그리기의 문제, 체스판 위의 요각의 나이트 길 그리고 그리스-라틴 사각형 등의 수학적 오락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가 "오일러는, 거의 은유법을 쓰지 않고 과장도 없이, 말하자면 해석학의 화신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오일러는 사람이 숨을 쉬듯,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듯이 어떤 외견상의 노력 없이 계산했다."고 칭찬한 것 등 열렬한 찬사가 오릴러에게 쏟아졌다.

오일러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큰아들 요한 알브레히트 오일러(Johann Albrecht Euler, 1734-1800)는 물리학 분야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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